-
윤근수 등이 사총병을 만나고 29일 사이에 군사를 발정시켰다고 보고하다.
예조판서 윤근수(尹根壽)와 공조판서 한응인(韓應寅)이 아뢰었다.
“신들이 사총병(査總兵)이 머물고 있는 곳에 가 보니 병부우시랑 송응창(宋應昌)이 지난 8월 18일에 제본을 올려 22일 사이에 내려온 성지를 가져왔었습니다. 거기에 의하며 29일 사이에 …
-
윤근수 등이 심유격을 만나고 군사를 더 보내 줄 것을 청하다.
윤근수(尹根壽)와 한응인(韓應寅)이 아뢰기를,
“신들이 중로에 심유격(沈遊擊)을 가서 만났더니, 그가 ‘내가 하루만 머물렀다 요동에 가서 순안(巡按)들과 의논하여 대군을 발정케 하겠다.’ 고 하기에, 신이 5,000명의 군사를 발정하여 주길 청하였습니다…
-
전사한 훈련봉사 김호를 추증하고 대신을 인견하여 심유경의 강화회담 등을 논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훈련봉사 김호(金虎)는 수십 명도 못 되는 군졸로 한창 기세가 오른 1백여 명의 왜적을 만나 칼날을 무릅쓰고 돌진하였으며, 직접 적장과 맞부딪쳐서는 적장의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적장을 찔러 적장 3명을 베고 …
-
윤근수 등이 중국군이 산해관에 있는데 땅이 마르면 나올 것이라고 보고하다.
예조판서 윤근수(尹根壽)와 공조판서 한응인(韓應寅)이 아뢰었다.
“송응창(宋應昌)이 병마 70,000을 거느리고 이달 7일 중국 조정을 떠났는데, 앞서 가인(家人) 6명을 파견하여 낙참장(駱參將)의 파발이라고 명칭을 붙여 평양의 적세를 탐지한 뒤에 나올…
-
중국군 경략 송응창이 보낸 격문.
흠차경략요계보정산동등처방해어왜군무병부우시랑(欽差經略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兵部右侍郞) 송응창(宋應昌)이 격문을 보내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이 동해지역에 나라를 세워 천조(天朝)의 정삭을 받들고 200여 년 동안 조공을 바치고 충순을 보여온 …
-
윤근수가 요동에서 송응창 등에게 구원병을 청하며 올린 글.
행 예조판서 윤근수(尹根壽)가 요동으로부터 돌아왔다. 윤근수가 요동에 이르러 경략 송응창(宋應昌), 광녕총병관 양소훈(粱紹勳), 순무어사【그 이름은 잊었다.】에게 글을 올렸는데,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가 양구(陽九)의 운수를 만나 혹심한 병화를 입어 …
-
윤근수가 심유격을 만나 왜적과 만난 일을 물러본 뒤 보고하다.
예조판서 윤근수(尹根壽)가 아뢰었다.
“심유격(沈遊擊)이 방금 용만관(龍灣館)에 도착했기에 신이 유격을 면대하고 말하기를 ‘노야께서 광녕(廣寧)에 있을 때 나에게 말하기를 「왜적들이 두 왕자를 돌려보내고, 포로로 된 그대 나라의 남녀를 모두 그대 나라에…
-
경략 송응창이 심유경의 이간에 속지말라며 조선에 보낸 자문.
흠차경략계요보정산동등처(欽差經略薊遼保定山東等處)방해어왜군무(防海禦倭軍務)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 송응창(宋應昌)이 본국에 이자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이 우리 중국의 동해 외번이 되어 대대로 충정을 돈독히 하고 조공을 정성껏 하였는데 하루아…
-
중국군의 동향과 출병 시기 등에 대해 이산보가 올린 보고문.
이조판서 이산보(李山甫)가 치계하였다.
“신이 8일 배사한 후에 중강(中江)을 건넜는데 중국 군졸이 관문을 닫고 완강하게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누구든지 마음대로 지나가지 못한다. 이는 바로 금약이다. 동참장(佟參將)이 송시랑(宋侍郞)을 영접하는 일로 떠…
-
비변사가 명군과 상의하여 군량을 조치하겠다고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었다.
“성상께서 세우신 계책은 실로 만전을 기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미 수만 명의 대병을 조발하여 뒤를 잇는다고 합니다. 군대를 조발하는 책임은 명나라 조정에 있고 군량 조달의 책임은 우리나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