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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전투 후에 양 총병이 왜적에 대한 정보 부족을 질책했다고 심희수가 보고하다.
이에 앞서 부총병 조승훈(祖承訓), 유격장군 사유(史儒)·왕수관(王守官) 등이 평양에 진격하여 17일 동틀 녘에 평양으로 돌격, 성에 포를 쏘고 관을 부수면서 길을 나누어 쳐들어가 몸을 돌보지 않고 전투를 독려하였다. 사유가 사졸보다 앞장서서 천총(千摠) 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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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수가 양총병을 만나 왜적에 대한 정보, 조선군의 투항설 등을 해명하다.
좌의정 윤두수(尹斗壽)가 아뢰었다.
“신이 양총병이 주둔하고 있는 구련성의 촌가에 도착하여 정문하고, 홍수언(洪秀彦)을 시켜 고하게 하기를 ‘과군은 사유격이 힘껏 싸우다가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는 오로지 우리나라 때문이어서 놀랍고 애통함을 이기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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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중이 중국군의 도착 상황과 인원, 및 출정 일정을 아뢰다.
호조판서 이성중(李誠中)이 아뢰었다.
“소신이 명을 받고 홍수언(洪秀彦)과 함께 구련성(九連城)에 나아가 ‘전일 사유격은 불행히 전사하였으나 조총병(祖總兵)이 성을 넘어 들어가 적병을 마구 죽였고 노야(老爺)가 또 강가에 주둔하여 성원하였기 때문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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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의 동향과 출병 시기 등에 대해 이산보가 올린 보고문.
이조판서 이산보(李山甫)가 치계하였다.
“신이 8일 배사한 후에 중강(中江)을 건넜는데 중국 군졸이 관문을 닫고 완강하게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누구든지 마음대로 지나가지 못한다. 이는 바로 금약이다. 동참장(佟參將)이 송시랑(宋侍郞)을 영접하는 일로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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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민영경이 이제독을 만나 출병 일정과 양향 상황을 논의한 뒤 보고하다.
동지 민여경(閔汝慶)이 아뢰었다.
“신이 23일 아침에 우연히 제독을 봉황성 앞길에서 만났습니다. 신이 통사 진효남(秦孝男)을 시켜 꿇어앉아 자문을 바치게 하고, 신이 고하기를 ‘심야(沈爺)가 기한이 지나도록 보고가 없어 왜적들이 스스로 의아해 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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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반사 윤근수가 중국군의 진퇴상황을 아뢰다.
접반사 윤근수(尹根壽)가 아뢰었다.
“신은 ‘부장(副將) 양원(楊元)이 봉황성(鳳凰城)에 가서 경략과 병사를 의논하고, 왕래할 적에 동총병(佟摠兵)을 다 만나보았다.’ 는 말을 들었습니다. 서일관(徐一貫)은 곧 퉁장군의 찬획이라 필시 그 내용을 참여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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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부윤이 요병이 남행할 길일을 기다린다고 서장을 올리다.
의주부윤(義州府尹)이 서장을 올리기를,
“본월 4일에 종유격(終遊擊)의 차관이 압록강 등 세 강에 선척을 정비하여 대병을 도하(渡河)시킬 일로 나와서 말하기를 ‘포정(布政) 양호(楊鎬)가 도어사(都御史)로 승진되어 요병 3천 7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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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병사 이경준이 여진족의 포로였던 중국인의 도망에 대해 서장을 올리다.
평안도 병사 이경준(李慶濬)【판서 이증(李增)의 아들인데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면서 실적이 좋았다. 그러나 경솔하고 자만심이 있어서 무슨 실수가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퍽 걱정하였다.】의 서장에,
“만포첨사(滿浦僉使) 임순(林恂)의 치보에 ‘이달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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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부윤 황진이 오총병과 마제독의 출병을 보고하다.
의주 부윤 황진(黃璡)이 치계하였다.
“오총병(吳總兵)이 남병 5천 명을 영솔하고 5월 7일에 길을 출발하여 구련성(九連城)에 도착한 다음 1~2일간 머물다가 압록강을 건널 것이라 하고, 마제독(麻提督)은 이달 4일에 광녕(廣寧)에서 출발하여 요동을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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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가 유사당상 김명원 등이 섭유격을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을 아뢰다.
비변사가【유사당상 김명원(金命元)·윤선각(尹先覺)】아뢰기를,
“신이 오늘 섭유격(葉遊擊)을 보러 갔더니, 섭유격이 양향을 조치하는 일을 극진히 말하고, 또 말하기를 ‘손시랑(孫侍郞)【손광(孫鑛)】이 금주(金州)·복주(復州)·해주(海州)·개주(蓋州)【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