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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염을 임현으로 개차하고 심 사신을 함양 ․ 거창 등지로 이주케 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양총병(楊總兵)이 말한 접반(接伴)할 고위의 배신과 군량을 관할하는 호조의 당상관을 이조로 하여금 속히 조처하게 하였으며, 여러 장수 이하들에게 총병의 지휘를 받게 하는 일과 남원의 성곽을 수축하는 일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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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관찰사 정윤우가 왜군의 의령 진입과 아군의 상황을 보고하다.
충청도관찰사 정윤우(丁允祐)가 치계하였다.
“군문차관이 말하기를 ‘이달 5일에 왜적이 의령(宜寧)에 돌입하여 진주(晋州)·곤양(昆陽)·하동(河東) 등처에 가득 차 있다. 우병사는 성을 버리고 합천(陜川)으로 퇴진하였으며 도원수는 성주(星州)·금산(金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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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 형개에게 전진을 청하는 자문을 보내다.
총독 형개(邢玠)에게 보낸 자문은 다음과 같다.
“9월 19일에 흠차총독도찰원우부도어사(欽差總督都察院右副都御史) 형군문이 보내신 자문을 받았는데 역시 전진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직은 본디 용렬한 사람으로 천자의 명을 받고 조상의 유업을 이어 동번(東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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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우병사 김응서의 건의대로 권양 ․ 조응인 ․ 박광선을 포상하기로 하다.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장계하기를,
“신이 항복한 왜인을 불러서 보살펴 준 뜻은 왜적을 방어하는 데 쓰려고 한 것이었으나, 혹 범을 길러 화를 끼침과 같다 하여 늘 죽이고자 하니, 항복한 왜인들이 이러한 기미를 알고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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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독총병부에 적군의 동태와 대비책, 우리 장수의 전과를 알리게 하다.
제독총병부(堤督摠兵府)에 이자하였다.
“조선국왕은 왜적의 정세가 긴급한 일로 자문을 보냅니다. 본년 10월 28일에 접수한흠차제독남북수륙관병어왜총병관후군제독부도독동지 마(麻)의 자문에 ‘흠차총독경략군무병부상서 형(邢)의 헌패(憲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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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우도 절도사 정기룡이 함양 등에서의 전투상황과 적정을 치계하다.
경상우도 절도사 정기룡(鄭起龍)이 치계하였다.
“신이 삼가 유지를 받드니, 중국의 대군이 남하할 적에 도원수의 장계에 의거하여 군인을 정제(整齊)하여 맞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소속인 각 고을의 군병에 대해 책자를 만들어 올립니다. 우도 31고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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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이 안동에서 민심동요 상황을 알리고, 군대 재편성을 요청하다.
겸사도도체찰사 의정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안동(安東)에 있으면서 장계를 올리기를,
“중국군이 물러난 뒤 도내의 사람들이 다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다고 여겨, 길에서 양식을 운반하던 사람들이 혹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들이 있는 힘을 다해 양식과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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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군이 협의하여 대구 ․ 상주 등에 둔전을 설치 장기전에 대비키로 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우의정 이원익(李元翼) 등이 군문에게 고할 때, 군문이 분부한 내용은 각처에 성을 쌓고 경작하는 것을 모두 중국과 힘을 합쳐 함께 하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덕형(李德馨)의 장계에는 다섯 곳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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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총 해생의 합천 ․ 거창으로의 진군 현황을 보고하다.
부총 해생(解生) 등이 가정 500명을 두 길로 나누어 나아갔는데, 본길은 합천 삼가에 이르러 약 200여명의 왜적을 만나서 수급 72개를 얻고 조선인 남녀 150여 명을 되찾았으며, 서쪽 길은 거창(居昌) 감팔(憨八)에 이르러 약 300여명의 왜적을 만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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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수 ․ 한술 ․ 강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6547. 윤두수·한술·강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윤두수(尹斗寿)【*.】를 영의정으로, 한술(韓述)을 장례원판결사로, 강연(姜綖)을 군기시 정으로, 경섬(慶暹)과 권경우(権慶祐)를 사헌부장령으로, 유인길(柳寅吉)을 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