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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강에 나아가 왜변과 일본 사신의 대우에 관해 의논하다.
주강에 나아갔다. 상이 이르기를,
“요사이 왜변에 관한 서장이 잇달아 오는데, 이는 좀도둑이 아니고 적의 기세가 매우 왕성한 것이어서 지극히 염려스럽다. 또 객사는 어떻게 하면 도리에 맞게 대우하게 되겠는가? 내부적으로는 만일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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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화령 부윤이 되어 동북면에 출몰한 왜구를 방어하다.
공민왕 21년(1372) 임자 6월, 왜적이 동북계(東北界)에 침구하니 태조를 화령부윤(和寧府尹)으로 삼고, 그대로 원수(元帥)로 삼아 왜적을 방어하게 하였다. 요성(遼城)의 장수 처명(處明)이 이때 나이 이미 늙었는데 태조를 따라 화령(和寧)에 가서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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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와 최영이 군사를 징발하여 덕적도 등의 왜적을 방비하다.
신우(辛禑) 원년(1375) 을묘 9월, 왜적의 배가 덕적도(德積島)·자연도(紫燕島) 두 섬에 많이 모이니, 우왕(禑王)은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태조와 판삼사사(判三司事) 최영(崔瑩)으로 이를 거느리게 하고,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에 군대의 위엄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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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이 강화부에 침입하니, 태조가 서강에서 군사력을 시위하다.
신우(辛禑) 3년(1377) 정사 3월, 왜적이 강화부(江華府)에 침구하니 서울이 크게 진동하였다. 태조와 의창군(義昌君) 황상(黃裳) 등 11원수(元帥)를 시켜 서강(西江)에 군대의 위엄을 보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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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지리산에서 왜적을 섬멸하다.
5월,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 우인렬(禹仁烈)이 비보하기를,
“나졸들이 말하기를, ‘왜적이 대마도(對馬島)로부터 바다를 뒤덮고 오는데 돛대가 서로 바라다보인다.’하니, 도와서 싸울 원수(元帥)를 보내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때 왜적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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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서해도에 침구한 왜적을 해주에서 격퇴하다.
8월, 왜적이 서해도(西海道)의 신주(信州)·문화(文化)·안악(安岳)·봉주(鳳州)를 침구하니 원수(元帥) 찬성(贊成) 양백익(梁伯益)·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 나세지(羅世知)·문하(門下) 박보로(朴普老)·도순문사(都巡問使) 심덕부(沈德符) 등이 패전하여 장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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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와 최영이 해풍군에서 왜를 물리치다.
신우(辛禑) 4년(1378) 무오 4월, 왜적의 배가 착량(窄梁)에 많이 모여 승천부(昇天府)승천부(昇天府)경기도 강화로 들어와서 장차 서울을 침구하겠다고 소문을 내니, 중앙과 지방이 크게 진동하였다. 병위(兵衛)를 대궐 문에 배치하여 적군이 이르기를 기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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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 500척이 진포에 침입하자 태조가 왜장 아기발도를 죽이다.
신우(辛禑) 6년(1380) 경신 8월, 왜적의 배 500 척이 진포(鎭浦)에 배를 매어 두고 하삼도(下三道)에 들어와 침구하여 연해의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다 없어지고,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시체가 산과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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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선 150척이 함주, 북원, 북청을 침구하니 태조가 격퇴하다.
9월, 명나라 사신 장부(張溥)·주탁(周倬) 등이 국경에 이르러서 태조와 이색(李穡)의 안부를 물었다. 이때 태조와 최영은 위명이 천하에 널리 알려졌으므로, 장부 등에게 이들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모두 밖에 나가 있었는데, 최영은 교외에 나가 둔을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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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왜구침구를 이유로 요동정벌을 반대하다.
4월, 봉주(鳳州)에 머물렀다. 태조에게 이르기를,
“과인이 요동을 공격하고자 하니 경 등은 마땅히 힘을 다하라.”
하니, 태조가 아뢰기를,
“지금에 출사(出師)하는 일은 네 가지의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