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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안신이 왜구를 막을 병선을 제조할 것을 상소하다.
병조 참의 박안신(朴安臣)이 상서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도리는 오직 마땅히 지난 일을 거울삼아 뒷일을 염려하여, 그 장구히 다스려지고 오래 편안하기를 도모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고 왜도(倭島)와 심히 가까와서, 예전 삼국시대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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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황상과 원황이 중국군의 상황과 진군에 대해 이자하다.
경략찬획계요보정산동등처방해어왜사무(經略贊畫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事務)에 흠차된 4품관 병부무고청리사원외랑(兵部武庫淸吏司員外郞) 유황상(劉黃裳)과 직방청리사주사(職方淸吏司主事) 원황(袁黃)이 이자하였다.
“대개 급히 진병하여 왜적을 섬멸하고 곧바로 왕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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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병이 진주성으로부터 군병을 나누어 곤양 ․ 하동 ․ 산음 등지를 노략질하다.
적병이 진주성으로부터 군병을 나누어 곤양(昆陽)·하동(河東)·삼가(三嘉)·단성(丹城)·산음(山陰) 등 여러 고을을 노략질하고 지리산(智異山)을 크게 수색하였는데, 모두 전년에 적봉(賊鋒)이 이르지 않은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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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의 향화승 신옥에게 도첩을 주어 서울 근처의 절에서 살도록 허락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왜인의 향화승(向化僧) 신옥(信玉)의 공초에 이르기를, ‘저는 본시 대마도(對馬島) 사람으로 나이는 이제 31세이고, 아명은 두이다지(豆伊多知)이며, 아비는 시라삼보라(時羅三甫羅)라고 합니다. 본도의 사포(沙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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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9일 함락된 진주성 싸움의 자세한 경과.
당초에 적추(賊酋)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제추의 군대를 합치면 30만이라고 하였는데 어떤 자는 7~8만 명이라고 하였다. 왜적이 수륙으로 함께 나아가 진주를 공격하려 할 때 총병(總兵) 유정(劉綎)은 유격(遊擊) 오유충(吳惟忠)과 함께 대구(大丘)에 있고,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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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독을 접견하여 남쪽의 적세, 방어책을 논하고 예단을 주다.
이제독(李提督)과 양부총(楊副總)이 황주(黃州)에 이르니, 상이 제독에게 재배하자 제독도 답배하였다. 상이 또 양원에게 재배하니, 양원이 답배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대인의 은덕을 입어 오늘이 있게 되었으므로 온 나라의 군신이 그 은혜를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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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관 유대기가 진주성의 함략 경위, 적도의 동향에 대해 보고하다.
선전관 유대기(兪大祺)가 치계하였다.【이 달 16일에 진주(晋州)에 있으면서 한 것이다.】
“신이 진주에 도착하여 성이 함락된 경위와 적도의 거류 등에 관한 일을 추문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6월 21일 이른 아침에 왜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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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지리산에서 왜적을 섬멸하다.
5월,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 우인렬(禹仁烈)이 비보하기를,
“나졸들이 말하기를, ‘왜적이 대마도(對馬島)로부터 바다를 뒤덮고 오는데 돛대가 서로 바라다보인다.’하니, 도와서 싸울 원수(元帥)를 보내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때 왜적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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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 500척이 진포에 침입하자 태조가 왜장 아기발도를 죽이다.
신우(辛禑) 6년(1380) 경신 8월, 왜적의 배 500 척이 진포(鎭浦)에 배를 매어 두고 하삼도(下三道)에 들어와 침구하여 연해의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다 없어지고,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시체가 산과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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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
공민왕 23년에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이희(李禧)가 수전(水戰) 훈련에 관해 왕에게 글을 올렸다. 왕이 개탄해 말하기를
“이희는 조정 밖에 있는 신하인데도 이렇게 건의하고 있다. 그런데 조정의 관료들과 나를 시위하는 군인들 중에는 일찍이 한 사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