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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가 군율을 잃은 김여율 ․ 이덕남 ․ 김억추 등을 처단하라고 청하다.
양사가 아뢰기를,
“사변이 발생한 뒤로 제장들이 군율을 잃은 탓으로 적세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우선 그 중에 더욱 심한 자를 들어 아뢰겠습니다. 장연현감(長淵縣監) 김여율(金汝嵂)은 5월 18일 임진강 전투에 척후장(斥候將)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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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원이 주장을 버리고 도망했던 강원소모사 심우정의 추국을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강원도소모사 심우정(沈友正)이 앞서 도원수의 종사관이었을 적에 임진강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자 그의 주장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소모(召募)하는 임무를 맡고서는 단지 근처의 수령으로 하여금 군관을 뽑아서 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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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수가 개성의 왜적을 정탐한 일을 아뢰다.
좌의정 윤두수(尹斗壽)가 치계하였다.
“앞서 성을 지키던 고책(高策) ․ 양심(梁心) 두 유격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서 정탐하니, 적이 개성의 동쪽 들에 주둔하고 있으므로, 제독이 야불수(夜不收)에게 명령하여 급히 두 장수를 조발하여 형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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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독이 파주에 진주했다가 벽제에서 왜적에게 대패한 상황을 기록하다.
앞서 이제독(李提督)은 평양(平壤)을 탈환하고는 승승장구하여 정월 초열흘날 밤에 개성부에 들어왔다. 본부의 사족과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 은 100냥과 쌀 100석을 내어 장세작(張世爵)을 시켜 나누어주어 진휼하게 하고, 패로써 유정(劉綎)의 군대를 재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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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근수가 경성으로 진격하기를 청하며 경략에게 자문을 올리다.
예조판서 윤근수(尹根壽)가 경략에서 상서하였다.
“우리나라가 군량과 마초를 미처 운송하지 못하여 경성 가까이 진군한 중국의 병마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개성으로 물러났습니다. 국왕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시고 깜짝 놀라 급히 배신을 보냈습니다. 친히 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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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황상과 원황이 중국군의 상황과 진군에 대해 이자하다.
경략찬획계요보정산동등처방해어왜사무(經略贊畫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事務)에 흠차된 4품관 병부무고청리사원외랑(兵部武庫淸吏司員外郞) 유황상(劉黃裳)과 직방청리사주사(職方淸吏司主事) 원황(袁黃)이 이자하였다.
“대개 급히 진병하여 왜적을 섬멸하고 곧바로 왕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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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외를 접견하고 관의 설치, 중국군의 주둔 등을 논의하다.
상이 백상루(百祥樓)에 가서 유원외(劉員外)를 접견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이 우리나라를 위해 멀리까지 와서 수고합니다. 기전(畿甸) 근처가 이미 분탕되고 패잔한 나머지 소홀히 대한 일이 있을 것이니 더욱 미안합니다.”
하니, 원외가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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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반사 김찬이 백성의 중국 입국 금지와 손시랑에게 정세가 위급함을 고하는 일을 의논하다.
접반사(接伴使) 김찬(金瓚)이 아뢰기를,
“독부(督府)가 머문 지 2년 동안에 양남의 굶주린 백성이 병영에 들어가서 방자가 되기도 하고 중국 병사에게 시집도 갔습니다. 군중에 신칙해서 데리고 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미리 독부에 고하고,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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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당의 의논에 따라 경상 ․ 전라를 중심으로 왜적을 방비해야 한다는 내용의 주문을 보내다.
묘당의 의논을 따라 우리나라의 사정을 진달해서 채택에 대비하는 일로 주문을 보내었는데, 주문은 다음과 같다.
“만력(萬曆) 22년 7월 16일에, ‘동봉을 믿을 수 없으므로 공경히 방어할 의논을 진달해서 성명의 결단으로 치안을 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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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총병을 접견하여 호남의 방비와 수군 등의 문제를 대화하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행행하여 양총병(楊總兵)【양원(楊元)】을 접견하였다. 상이 배례를 하겠다고 청하자, 양원이 사양하기를,
“전일 교외에서 맞이하실 때에 이미 배례를 행하셨으니, 읍만 하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