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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호군하는 비용으로 은 2만 냥을 내리다.
황제가 호군하는 비용으로 은 2만 냥을 내리고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도록 명하였다.
조승훈(祖承訓)이 이미 패배하자 행재소에서 크게 두려워하여 요진(遼鎭)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파견해서 구원해 주기를 계속 청하니, 병부에서 주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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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대병을 파견하여 구원하게 하다.
황제가 대병을 파견하여 와서 구원하게 하였다.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먼저 압록강을 건넜다. 황제가 우리의 주청을 허락하고 병부시랑(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을 경략군문(經略軍門)으로, 도독동지(都督同知) 이여송을 제독군무(提督軍務)로 삼았다. 그리고 부총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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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독 이여송이 평양에 진군하여 싸워 이긴 뒤 승첩을 상주하게 하다.
다음날【6일】진군하여 평양에 접근하였다. 제독이 대군을 서둘러 행군시키자 도원수도 제진의 군사를 합쳐 거느리고 그 뒤를 따랐다. 군사를 나누어 에워싸니 적은 성에 올라가 굳게 지키면서 모란봉(牧丹峯)을 거점으로 높은 위치에서 총을 쏘아댔다. 제독이 진정병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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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독 이여송이 적을 추격하여 문경까지 갔다가 되돌아와서는 해변에 주둔하다.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적을 추격하여 문경(聞慶)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경략이, 왜적이 경성을 버리고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패를 내어 제독을 재촉해 추격케 하였으나 적이 떠난 지 이미 수십 일이 지난 뒤였다. 제독은 길에서 천천히 행군하는가 하면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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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이 진주를 함락시키자 김천일 ․ 최경회 등이 전사하다.
왜적이 진주를 함락시켰다.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 등이 전사하였다.
당시 진주에서 급변을 보고하니, 이여송(李如松)이 경성에서 열둔의 제장인 유정(劉綎)·오유충(吳惟忠)·낙상지(駱尙志) 등에게 전령하여 군사를 전진시켜 구원하게 하였으나, 제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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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병이 진주에서 호남을 침범하고 돌아가다.
적병이 진주에서 호남을 침범하고 돌아갔다.
적병이 갑자기 구례현(求禮縣)에 들이닥쳤다. 불의에 적이 이르렀으므로 사민들이 태반이나 상해를 입었는데, 적은 마을을 불태우고 성곽을 무너뜨렸다. 남원(南原)의 군민이 이 소식을 듣고 놀라 흩어져 하룻밤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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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병이 경주 안강현을 노략질하자 명나라 군사가 불리한 형세로 싸우다.
왜병이 경주 안강현(安康縣)을 노략하였는데, 명나라 군사가 그들과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왜병이 오래도록 해상에 둔을 치고는 강화의 일을 완결하겠다고 말하면서 수시로 나와 노략질하여 양곡을 거두어갔다. 유정(劉綎)이 행장(行長)에게 서신을 보내어 꾸짖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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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장수 낙상지와 사대수 등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다.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와 사대수(査大受) 등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낙상지가 유성룡(柳成龍)·이덕형(李德馨) 등에게 말하기를,
“내 생각으로는 왜인이 비록 조공 바치는 일에 대해 허락을 얻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곧 물러가지는 않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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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총병 양원이 경성을 경유해 남쪽으로 내려가니 정기원을 접반사로 삼다.
부총병 양원(楊元)이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먼저 경성에 도착하여 몇개월 머물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니, 예조참판 정기원(鄭期遠)을 접반사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참장 낙상지(駱尙志)가 남원성(南原城)을 증축하였는데, 양원이 도착하여서 지킬 만하다고 여겼다.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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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관찰사가 임진왜란 때 무공이 있는 참장 낙상지를 무열사에 모시도록 장계하다.
평안도 관찰사 홍양호(洪良浩)가 장계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나라가 가방을 재조하게 된 것은 황조의 은혜가 아님이 없으며 또한 우리나라를 구원한 여러 장수들이 의를 지니고 무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를 구원한 공로로는 평양에서의 승리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