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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등을 인견하고 평양성의 왜적, 요동 망명 등을 논의하다.
상이 행궁의 동헌에 나와 삼도도체찰사 정철(鄭澈)을 인견하였다.【좌의정 윤두수(尹斗壽), 승지 민준(閔濬), 주서(注書) 강욱(康昱).】상이 이르기를,
“경은 잘 가라. 성공하면 국가의 다행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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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최흥원 등과 선릉과 정릉의 처리, 왜적의 토벌 등을 논의하다.
영의정 최흥원(崔興源)이 선릉과 정릉을 봉심한 뒤에 대신들을 인견하여 의논하여 처리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청민당(聽民堂)에 나아가 여러 재신들을 들어오도록 명하니 영의정 최흥원, 좌의정 윤두수(尹斗壽), 부원군 정철(鄭澈), 판돈녕 정곤수(鄭崑壽), 지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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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식량과 군병을 지원받는 문제 ․ 흉년으로 백성이 식인하는 문제 등을 대신 등과 의논하다.
상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 및 비변사의 유사당상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도사(張都司)의【이름은 삼외(三畏)임】자문을 보니 산동의 양곡을 지급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무슨 뜻인가?”
하니,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아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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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의 아들 전 현령 고종후가 부친의 남은 군사를 거두어 별군을 만들다.
복수할 사람을 불러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 처음에 고경명(高敬命)이 패한 뒤 그의 아들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가 상복을 입고 종군하며 부친의 남은 병사를 거두어 별군을 만들었다. 이때에 이르러 체찰사 정철(鄭澈)이 조정의 뜻을 선포하며 권유하자 홍계남(洪季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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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장이 진주를 공격하니, 원수가 관군과 의병에게 방비하게 하다.
왜장이 군사를 연합하여 진주를 공격하였다.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등이 성에 들어가서 굳게 지키니, 청정(淸正)·평의지(平義智)가 군사를 다 동원하여 진주로 향했는데 30만으로 일컬었다. 송경략(宋經略)이 심유경(沈惟敬)에게 서신을 보내 꾸짖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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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이 진주를 함락시키자 김천일 ․ 최경회 등이 전사하다.
왜적이 진주를 함락시켰다.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 등이 전사하였다.
당시 진주에서 급변을 보고하니, 이여송(李如松)이 경성에서 열둔의 제장인 유정(劉綎)·오유충(吳惟忠)·낙상지(駱尙志) 등에게 전령하여 군사를 전진시켜 구원하게 하였으나, 제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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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의 방어 준비 상황을 보고하다.
창의사(倡義使) 판결사(判決事) 김천일(金千鎰)이 치계하였다.
“신이 이 달 14일에 진주성(晋州城)에 도착하였는데, 목사 서예원(徐禮元)이 중국군 지대하는 일로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왔습니다. 그와 함께 변란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일을 상의하여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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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9일 함락된 진주성 싸움의 자세한 경과.
당초에 적추(賊酋)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제추의 군대를 합치면 30만이라고 하였는데 어떤 자는 7~8만 명이라고 하였다. 왜적이 수륙으로 함께 나아가 진주를 공격하려 할 때 총병(總兵) 유정(劉綎)은 유격(遊擊) 오유충(吳惟忠)과 함께 대구(大丘)에 있고,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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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이 진주성 전사자 포상, 유성룡 소환, 어용 보호 등의 일을 아뢰다.
정원이 아뢰기를,
“양남(兩南)의 보장(保障)으로는 오로지 진주성(晋州城) 한 곳만이 믿을 만하기 때문에 맹장 경졸(勁卒)이 모두 성중으로 들어갔는데, 열흘이 넘도록 포위당하였으나 외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싸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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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가 정원의 계사에 대해 전사자 포증 연기 등의 의견을 밝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정원의 계사를 보니 모두가 긴급한 시무였습니다. 진주의 일이 수양(睢陽)의 포위와 매우 흡사합니다. 힘을 다해 고수하였지만 외원이 이르지 않아 끝내 성이 함몰되었으니 그 참혹하고 원통한 상황을 말하자니 기…